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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motion/메모장

매일 같은 아침을 먹는 사람은 지루한 게 아니다

by mummoo 2026. 5. 15.


루틴 1

 

난 에세이를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소설이나 지식 전달 기반의 책에는 눈이 안 갔다.

친구가 많이 없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해서, 책을 통해 사람을 배웠다.

가장 좋아했던 책은 데미안과 이방인이었다.

내가 느끼는 내면의 혼돈을 책을 통해 이해할 수 있어 참 좋았다. 

 

20대를 지나, 요즘엔 명작보다 최근에 쓰인 에세이를 많이 읽는다.

아무래도 옛날 사람보단 요즘 사람과 친구하고 싶으니까.

 

요즘 밤에 읽는 책은 한은형 작가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다. 술 책이다, 술 책!

작가의 술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3~4장 남짓의 에피소드들이 독립적으로 기술된 책이다.

작가는 술을 정말 좋아하는지, 술의 역사, 술과 관련된 유용한 정보 등을 에피소드마다 끼워넣는다.

난 화이트와인을 열고 오래 지나면 발사믹 식초 대용으로도 쓸 수 있다는 걸 이 책으로 처음 알았다.

작가의 말투에서부터 신이 난 게 느껴져서 너무 귀엽다.

어떤 것을 좋아하면 그것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은 게 인간의 심리인가보다. 

 

최근에 2편이 나왔다. 1월 1일 교보문고에 갔다가 신작/베스트셀러 칸에서 발견했다.

너무 사고 싶었는데 그래도 새해 첫 날부터 술 책 사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다른 책을 샀다. 

좋아하는 책은 독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해보고 싶은 게 생겼다.

내가 좋아하는 피트로 채운 위스키셀러를 만들어놓고 싶다.

6병까지 들어가는 조그마한 셀러를 하나 사서

보상이 필요할 때, 정신이 지치고 힘들 때, 어울리는 잔 하나 꺼내고 마시면 참 좋을 것 같다.

나는 피트를 정말 좋아한다. 피트를 마셔야 내가 진짜로 위스키를 마시는 것 같다.

와인은 싫고, 버번, 블렌디드, 이런 섬세한 감각을 요구하는 술들은 애초에 맛을 느낄 수가 없다.

하지만 피트는 그 존재감이 강렬하다.

내가 좋아하는 높은 ppm의 피트는 목으로 넘기는 순간부터 본인의 입장을 알린다. 

피트 얘기는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어서, 

다음 번에 술 마시고 기분이 좋다면 피트 글도 하나 작성해봐야겠다. 

물론 셀러를 만든다면 엄마 몰래 해야 한다. 엄마한테 들키면 술이 사라진다.

 

아침에는 다른 에세이를 읽는다.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다. 

출근길이나 아침에 일어나기 싫을 때, 창문 열어놓고 햇빛 받으면서 침대에서 읽는다.

우연히 발견한 석학의 집념에 경외를 가진, 작가의 경험과 생각이 담겨 있다.

사실 많이 읽지 않았다. 나도 궁금하다. 그 석학의 무엇이 대자연의 물리적인 풍파에도 꺾이지 않았는지.

나도 내가 나아가는 길에 그러한 집념과 태도를 가지고 싶은가보다. 

 

아침 책과 밤 책은 달라야 한다. 

아침에는 활기를 주는 책, 스파클링 와인같은 책을 읽으며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고 싶고,

밤에는 묵직한 위스키같은 책을 읽으며 잠에 들고 싶다.

그런데 난 위스키같은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그냥 위스키를 마신다. 잠이 안 와ㅠ

 

에세이라고 다 좋아하는 건 아니다.

에세이 중 가르치려 드는 에세이들이 있다. 그런 건 싫다.

경험을 기반으로 쓰인 책이 정답을 요구하는 것이 거슬린다.

오직 본인의 경험만을 기반으로 훈수를 두면 참 반박할 여지가 많다. 바로 "너 뭔데?"부터 나온다.

사람의 인생에 정답은 없다. 각자 다른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미래에 영향을 미칠 뿐이다.

물론 확률 싸움이기는 하다. 그 작가의 말이 확률적으로 더 발생 가능할 일일 수는 있다.

그래도 자신의 가치관과 경험이 정답인 양 얘기하는 것을 굳이 돈 들이고 시간 들여가면서 보고 싶지 않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도 정답인 척 포장해 얘기하는 건가?

아니다 이건 그냥 내 가치관이다. 남들이야 어떻게 살든 알 바 아니다.

요즘에도 여전히 에세이가 제일 좋다. 제일 마음이 편하다. 모르겠다. 작가들이 다 내 친구같다.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설명하고, 풀어내고, 몇십 몇백 장에 걸쳐 얘기할 정도의 열정이 좋다.

 

내가 부여받고 가꿔나갈 수 있는 하루를 부여받은 것은 축복이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맞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책인 것 같다.

아님말공

 


루틴 2

 

매일 같은 아침을 먹고, 같은 길로 출근하고, 어느 식당에 가도 같은 음료를 주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겉으로 보면 단조롭고 재미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지루한 사람이 아니라,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자신만의 안정 구조를 만든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반복은 지루함이 아니라 안정감일 수 있다. 

우리는 종종 반복적인 사람을 재미없다고 생각한다. 늘 같은 메뉴를 고르고, 같은 루틴을 유지하고, 익숙한 선택을 반복하는 사람을 보며 “왜 저렇게 똑같이 살까?”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반복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반복은 하루를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작은 구조물이다.

아침 메뉴를 정해두면 하루의 첫 번째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익숙한 길로 이동하면 예상치 못한 변수에 에너지를 덜 쓰게 된다.     

늘 마시던 음료를 주문하면 최소한 하나쯤은 확실한 감각을 확보할 수 있다.   


불확실성이 많은 사람일수록 루틴이 필요하다.

삶이 예측 가능할 때 사람은 굳이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불안정하거나,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일이 많거나, 미래가 선명하지 않을 때 사람은 작고 확실한 것들을 붙잡게 된다.

그래서 같은 아침, 같은 길, 같은 음료는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오늘도 내가 나를 잃지 않기 위한 방식”이 될 수 있다.   

반복적인 루틴은 삶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일에 쓸 에너지를 남겨두기 위한 선택일 수 있다.     

 

모든 것이 매일 새로울 필요는 없다. 모든 선택이 특별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어떤 날에는 익숙한 것이 나를 살린다. 늘 먹던 음식, 늘 걷던 길, 늘 주문하던 음료가 이상하게도 사람을 진정시키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게으름도 아니고, 변화가 두려워서만도 아니다. 삶의 일부를 안정적으로 고정해두고, 나머지 불확실한 것들을 견디기 위한 방식에 가깝다.   
  

결국 루틴은 작은 자기보호다. 매일 같은 것을 반복하는 사람은 지루한 사람이 아닐 수 있다.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아주 조용하고 정교하게 삶의 구조를 세우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반복은 삶을 단조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삶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가장 현실적인 장치다.   


 

최근 몸이 좋지 않다. 되게 건강한 신체로 태어나서 웬만하면 잘 아프지 않는데, 

며칠동안 편두통에, 어지럽고 토할 것 같고, 식은땀이 난다.

집에 오고 아드빌 몇 알을 먹고 저녁 먹고 좀 쉬면 괜찮아진다. 

아무래도 해야하는 일에 비해 생각이 너무 많은 게 원인인 듯하다.

그건 내가 생각할 시간이 많아져서인데, 행동할 시간이 줄어서 그런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니까 그런 거다.

아침이 만족과 칭찬이 아닌 죄책감과 실망으로 시작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부터 다시 좀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것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만약 이걸로 컨디션 회복이 안 되면 발레를 줄여보려고 한다. 

발레를 매일매일 했는데, 이게 문제였나 싶기도 하고.

문제였을 리는 없다. 연구든 뭐든 성과에 목 매는 게 싫어서 발레를 늘린 거니까, 발레횟수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시간 맞춰 연구하는 것도 아닌데 시간 맞춰 발레하러 가면서

연구실 성과를 바랬던 게 스트레스의 원인이었던 것 같다.

일단 발레 좀 줄이고, 기상시간만 고정시켜보려 한다.

아침마다 책도 좀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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